인도네시아 화교 이야기

오늘은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도네시아 화교


용어정리

  •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 중국 조상을 가진 인도네시아인
  • 화(華) - "중국", "중국계"를 의미
  • 화교 – 중국인 교포
  • 화인 – 중국인

*화교와 화인을 구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크게 구별해서 쓰지는 않겠습니다.

  • 화상(華商) – 화교 상인
  • 대나무 네트워크(Bamboo Network) - 동남아시아의 화상 네트워크

인도네시아어 단어

  • Peranakan – 인도네시아 태생 화교 (*단어 속에 anak 은 아이라는 의미로,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
  • Totok – 중국태생 인도네시아 화교 (*자바어로 Totok은 “순수한, 순혈의”을 의미. 중국 이민자를 의미함)
  • Orang Cina, Orang Tionghoa – 화인, 화교 둘 다 됨
  • Orang Cina keturunan – 인도네시아 화교 (*keturunan은 “후세, 자손”이라는 뜻)

섞여 쓰이면서 뜻이 변하기도 하지만, 대략 이런 의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도네시아 화교 인구

인도네시아 화교는 거의 대부분 남방계 한족으로, 중국의 푸젠성(복건성)이나 광동성 출신이 많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화교는 2010년 인도네시아 호구조사 기준으로 2,832,510명이었고, 이는 당시 전체 인구의 1.2% 였습니다. 

이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계라고 주장한 사람들이었고, 1차 혼혈인인 경우, 아버지가 중국계인 경우에만 종종 자신의 정체성을 화교라고 하는 점을 감안하면, 순수 중국계는 저 수치보다 적으면 적었지, 결코 많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저 수치는 중국출신 외노자를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인 외노자를 포함한다 하더라도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면 2017년 기준으로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 발급된 KITAS 노동비자 수는 3만명 수준입니다. 가족을 다 포함한다해도, 인도네시아 내의 중국계 인구는 3백만이 안 될겁니다. (참고로 2017년에 KITAS 발급받은 한국인 수는 9천 5백명 수준) 

인도네시아 화교는 자바섬에는 약 51.8%가 살고, 그 중에 절반이 약간 안 되는 22.3%이 자카르타에 살고 있습니다. 즉, 자카르타는 약 63만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는 셈이죠.

자바섬 밖의 화교는 서깔리만딴 지역, 방카-블리퉁, 리아우 제도 등에 몰려살고 있고, 이들은 자바섬에서 다시 밖으로 나간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인도네시아 거주를 그 지역에서 시작한 경우입니다.

*사실 인도네시아에 오래 살았다는 한인이나, 한국계 인도네시아인들 조차도 인도네시아 화교가 1천만명이 넘는다거나, 심지어 전 인구의 10%는 된다는 등, 화교 숫자에 엄청난 뻥튀기를 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들의 말은 감으로 느끼는 수치일뿐, 절대 근거있는 수치는 아닙니다. 전 인구의 10%면 순다족 다음으로 많은 수치고, 1,000만이 넘는 민족 역시 자바족과 순다족 이외에는 없습니다. 인도네시아 3번째 다수 민족인 바딱족도 겨우 800만밖에 안 됩니다.




인도네시아 화교 특징


인도네시아 화교의 특징

인도네시아 화교의 특징을 다루기 앞서, 화교를 구분해서 보는 게 필요합니다. 인도네시아 화교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합니다.

  1. 인도네시아 태생여부
  2. 자바섬 화교 여부

먼저, 인도네시아 화교 중에서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화교들은 peranakan 이라고 하고, 중국에서 태어난 화교는 totok 이라고 합니다. 중국 태생 화교는 인도네시아 태생 화교에 비해, 종교 개념이 없고 가부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totok 들이 조금 더 중국인스럽죠. 그리고, 중국 태생 화교는 중국어가 모국어, 인도네시아어가 외국어인 반면, 인도네시아 태생 화교들은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죠. 물론 인도네시아 내에서는 peranakan(인도네시아 태생)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둘째로, 같은 인도네시아 화교(peranakan)라 할지라도, 자바섬 화교냐 자바섬 밖의 화교냐에 따라 다릅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수하르토 정권 시절에 중국 문화 말살 정책의 주요 단속 대상이 자바섬 화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대다수의 화교들이 믿던 유교나 도교가 유일신을 섬기지 않는 종교라는 이유로, 종교로 인정받지 못 하게 되자, 당시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종교를 바꾸게 됩니다. 이 때, 자바섬 안에서는 단속이 심해서, 동양 종교인 불교보다는 서양 종교인 기독교로 바꿨고, 자바섬 밖에서는 동양 종교인 불교로 바꾼 화교들이 많습니다.

또한, 자바섬 출신 화교들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경우가 적고, 심지어 중국어 이름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영어/기독교 이름이 많죠. 한편, 자바섬 밖의 화교들은 불교신자가 많고, 중국어도 유창한 경우가 많죠. (광동어나 객가어 등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가 아닌 경우도 많음)

최근에는 싱가폴 및 홍콩 등으로 유학을 보낸다거나, 부모 중 한 명이 중국태생 중국인인 경우가 많아, 만다린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자바섬 화교들도 많이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화교 문화 : 꽌시(关系)

인도네시아 내에 사는 화교들은 중국 문화의 특징인 꽌시(关系)문화가 있습니다. 꽌시는 한국어로 “관계”라는 뜻으로, 공사 구분이 안 되는 비즈니스 방식을 의미합니다. 즉, 인맥 비즈니스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은 서양식 비즈니스인 공사가 철저히 구별되고 실물 중심 시장원리로 돌아가는 비즈니스와 달라서, 가성비 비교로 물건을 구입하는 게 아닌, 인맥의 필요여부에 따라 물건의 구입을 결정되곤 합니다.

꽌시의 특징 중 하나는 화교들 사이에 거대한 인맥 덩어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아는 사람들을 연결해주고, 이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 나중에 자신에게도 비즈니스가 연결될 가능성을 높혀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돈을 벌려면 다른 경제인들과의 사회생활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첫 만남에 인맥과시하는 화교들이 많죠)

또 다른 특징은 뇌물입니다. 공공부문의 일을 수월하게 받기위해, 사적으로 친분을 쌓고, 그러기위해 돈을 쓰는 거죠. 

이러한 화상들의 뇌물 덕분에, 인도네시아 공무원들 중에서 요직에 앉아 부자가 된 경우도 흔합니다.



인도네시아 화교들의 재력

통상적으로 하는 말 중에, 3%의 화교가 70%의 인도네시아 경제를 쥐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닌 게, 인도네시아 재벌 20명 중 17명이 화교입니다. 하지만 이건 재벌 얘기고,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라도 평민들은 꼭 이렇진 않습니다.


인도네시아 화교 재벌

인도네시아 재벌 20명 중 17명이 화교

인도네시아 화교만 따로 떼서 나온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만나본 화교들은 일반적인 중국내의 중국인들 버는 정도는 버는 거 같았습니다. 프리부미(토착민)들보다는 확실히 더 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다고 한국인보다 더 버는 화교들은 의외로 적습니다. 그리고 아예 현지인과 별 차이 없이 버는 화교들도 많구요.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1% 상류층 사람들 숫자는 화교가 인도네시아의 모든 외국민족/내국민족 다 포함해도 월등히 많을 겁니다. 

물론 이런 점은 인도네시아만의 일은 아닙니다. 동남아시아가 전체적으로 화교 자본으로 움직입니다. 화교자본이 동남아 주식시장 상장사의 70%를 차지하거든요. (말레이시아의 70%, 태국의 80%, 필리핀의 60% 등등 다른 동남아 국가도 인도네시아 못지않게 화교 자본으로 운영됨)

동남아시아 화교 경제력

현지 토착민들과의 관계

인도네시아 화인들과 현지 민족들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다인종 국가이면서도, 서로 경제력과 종교가 크게 달라, 잘 섞이지 못 합니다.

뚜렷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통혼이 적습니다. 상호간에 결혼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간혹 인도네시아 토착민족과 결혼하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있지만, 상당히 드뭅니다. 

대다수의 동남아계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슬람이라는 아주 베타성이 강한 종교를 믿고, 인도네시아 화교는 기독교 혹은 불교를 믿죠. 거기다 화인들은 중화사상(중국이 최고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들 끼리끼리만 모이는 성격이 강합니다.





인도네시아 화교의 역사

인도네시아 화교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인도네시아 역사 이야기를 같이 보시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초기 유입

인도네시아 화교는 13세기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집니다. 

13세기는 몽골인들의 원나라가 아시아 대륙에서 급격하게 팽창하는 시점이었죠. 그 당시, 누산타라 열도(現 인도네시아)에서는 싱하사리 왕국이 망하고, 새로운 마자빠힛 제국이 세워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그 당시 화교들은 누산타라 열도에 평생 거주할 목적으로 살기 시작한 건 아니었습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장기거주를 시작했던 것이었죠. 그 중에 일부는 중국 본토로 안 돌아가고, 인도네시아에서 쭉 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남중국에서 내려왔고, 그들의 정체성은 순수 중국인이었습니다.


동남아 화교


식민지 시절

16세기부터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토에 서양인들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죠.

이 시기 쯤 해서, 1600년대에는 중국인들이 동남아로 엄청나게 퍼지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바로 명나라(한족)이 무너지고, 청나라(만주족)이 중국을 장악하게 된 거죠. 그리고 청나라는 광동성(홍콩을 둘러싼 중국성)만 빼고, 해상통행금지를 시켜버립니다. 이러니 동중국해에서 국제무역으로 먹고 살던 한족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동남아에 복건성을 비롯해, 동중국해 연안 성 출신 한족이 많은 이유임)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 동인도 총독부 예하에 살던 화교는 1619년에 겨우 수백명이었지만 1740년에는 만명을 넘어섰고, 이같은 화교 유입은 다른 동남아 지역도 마찬가지였죠.

네덜란드 점령기 동안 인도네시아의 화교들은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왜냐면, 인도네시아 화교들이 화상 네트워크를 통해 타국가 화교들과의 수출입을 하여, 총독부 경제에 기여했기 때문이죠. 이 때부터, 프리부미(인도네시아 원주민)과 화교들의 관계는 크게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절에 인도네시아 화인들의 삶은 매우 힘들어지게 됩니다. 이미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무너뜨렸고 동중국해를 장악한 일본인들은, 화교들은 수탈의 대상일 뿐, 상인으로 쓸 필요도 없었죠. 사실 당시 일본의 동남아 식민지들은 태평양 전쟁을 위한 기름이나 목재, 고무같은 전쟁물자 수탈을 위한 식민지로, 상인같은 건 아예 필요 없었으니까요.



인도네시아 해방과 독립전쟁 이후

미국에 의한 일본의 패망과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재침략 실패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 당시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은 네덜란드 시절 이전부터 잘 갖춰진 화상(華商) 네트워크로,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가 친중파였던 점도 한 몫하죠.

법적인 체계가 덜 잡혔던 독립 초기에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국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국은 속혈주의였고, 네덜란드 총독부 산하의 인도네시아는 속지주의였기 때문에, 이중국적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1955년 반둥회의에서, 인도네시아와 중국은 이중국적 협약을 맺고, 인도네시아 화교들에게 이중국적을 주었습니다. 이 때 조약중 하나가, 본인이 원하면 인도네시아 국적만 갖도록 하는 것이었죠.

이 국적 문제는 본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문제였는데, 이 중에 2/3 정도는 인도네시아 국적만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마오쩌둥(모택동)의 공산주의를 피하고 싶었던 거죠. 

당시 중국으로 돌아간 화교들은,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을 피해 대다수가 (당시 영국령이었던) 홍콩으로 도망갔습니다. 

물론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화인들의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습니다. 2대 대통령이자 쿠데타 독재자였던 수하르토는, 중국인들을 G30S(우파 장군 암살사건)의 배후로 보고 있었거든요.

이 때도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화교들이 중국 공산당의 쁘락치로 몰려 위협을 당했죠. 수하르토는 친중파였던 수카르노와 정반대로, 반중 캠페인을 벌입니다. 중국인들의 종교인 유교를 종교에서 빼버리고, 중국인 학교 및 중국어 어학당 등을 철거해버리고, 중국식 한자 이름 등을 못 쓰게 하는 거였죠. (수하르토의 이런 정책은 인도네시아 화교를 배척했다기보다, 인도네시아 화교의 정체성을 인도네시아인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수하르토는 화교를 싫어하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화교 사업가들과 사이좋게 정경유착으로, 대기업 만들어주고 돈을 많이 모았죠.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수하르토의 임기 말에 인도네시아 화교에게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사건으로 잘 알려진 1998년 5월 폭동입니다. 영어로는 1998년의 비극(1998 Tragedy),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학살(Chinese-Indonesian massacre), 중국어로는 검은 5월(黑色的五月) 등으로도 알려져있죠.

인도네시아 화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화교 학살 사건은 항상 언급되는데, 실제로 이 사건은 학살 사건이라기보다 “폭도들에 의한 화교 업체 약탈”이 더 정확합니다.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사건

사건의 진행은 이렇습니다. 1997년 5월에 선거가 있었고, 수하르토가 있는 골카르당이 74%로 압승을 한 가운데, 부정선거 의혹이 커집니다. 동시에 아시아 외환위기에 달러대비 루피아 가치는 1/6 수준으로 크게 떨어지고, 전기세는 3배로 오르는 등, 시민들은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됩니다.

1998년 5월, 서민들의 시위가 과격해지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수마트라 메단에서 중국 상점을 털던 시위자들에게 경찰들의 총기발포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후 5월 12일에는 자카르타 소재의 트리삭티 대학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했는데, 이 때 역시 발포로 4명의 학생이 희생당합니다. 학생들의 죽음은 시위를 폭동으로 만들었고, 폭도들은 돈많은 화교 상점을 터는 걸로 번집니다. 

총 사망자 수는 1,188명에, 85명의 여성이 강간피해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 화교들의 재산이 집중적으로 피해받은 건 맞지만, 실제로 사망자들은 무분별한 방화에 타죽은 폭도들이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위협에 처한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중국 및 대만, 싱가폴 등으로 잔뜩 도망갔는데, 특히 살림그룹 회장이었던 수도노 살림이 싱가폴로 도망간 일화는 아주 유명하죠. 

재벌이 빠져나가는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돈도 빠져나갔습니다. 

97~99년에 인도네시아에서 도합 200억불이 빠져 나가고, 중국 및 대만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의 외노자들을 내쫓는 등, 인도네시아가 폭망의 위기로 들어섭니다. 이 때 수하르토가 대통령직을 그만두게 되면서, 모든 게 종결되었죠.


  • 당시 화교와 같은 동아시아인인 한국계 교민들은 차에 태극기를 걸고 다녔다고 합니다.
  • 인도네시아 화교들도 그걸 보고, 자기네들 차에도 태극기를 걸었다고 합니다.
  • 당시 수하르토 측에서, 정부를 향한 폭동을 선동하여 화교에게 돌렸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군경들은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는 와중에도 강경진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부통령이었던 유숩 하비비가 남은 기간동안 대통령 대행을 맡으면서, 대통령들이 조금씩 화교 융화정책을 폈죠. 예를 들면, 화교도 정치할 수 있게 해주고, 중국 문화인 음력설을 휴일로 정해주고, 중국 종교인 유교도 잠깐이라도 종교로 인정해주는 것 등등이요.



자카르타 주지사 아혹 신성모독 사건

인도네시아 화교 정치인으로는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진 게 “아혹(Ahok)”으로 유명한 “바수키 차하야 푸르나마(Basuki Tjahaja Purnama)” 입니다. 

아혹은 원래 수마트라 블리퉁 섬 출신 정치인이었고, 현 대통령인 조코위도도가 자카르타 주지사였던 시절에, 아혹은 부주지사였습니다. 2014년에 조코위도도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면서, 아혹은 자카르타 부주지사에서 자카르타 주지사로 승격되었죠.

2017년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아혹은, 뿔라우 스리브 뿌라무카(Pramuka) 섬에서의 유세 도중에, 코란에 나오는 알 마이다 51절을 언급했었죠. 51절의 내용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친구 및 보호자로 선택하지 말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혹은 연설 중에 “알 마이다 51절을 이용해서 속이는 사람들 ~” 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여기서 아혹 반대파들이 “이용해서” 부분을 빼서 마치 “알 마이다 51절에 속은 사람들”로 SNS에 퍼트렸죠.

이로서 수많은 무슬림들로부터 아혹 규탄시위가 일어났고, 아혹은 선거에서도 지고, 신성모독죄로 2년형을 받게 됩니다. 1년 반정도 살다가 사면으로 나옵니다만, 정치 생명은 끝났고, 뻐르따미나(Pertamina)라는 국영기업에 위원장으로 발령받아 일하게 됩니다.

아혹을 투옥시킨 본 사건으로, 안 그래도 가깝지 않은 화교들과 인도네시아인들의 사이가 조금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