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역사


인도네시아의 역사는 크게 “중세-근대-현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는 수없이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고, 섬마다 역사적 사건의 발생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시기별로 깔끔하게 구별해서 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300년간 지배했다고 알려져있지만, 현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전 지역을 전부 점령하는데 약 300년이 걸렸고, 실제로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모두 장악한 건 약 30년 정도 뿐입니다.

본 글은 한국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핵심만 간추려서 쓰여진 글이고, 영문위키, 양승윤 교수님의 저서인 “인도네시아사”, 그리고 팀 해니건 교수님의 “A Brief History of Indonesia”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부 내용은 이해를 돕기위한 일부 제 해석이 있습니다. 정말 쉽게 쓰기위해 노력했습니다. 만약 일부 틀린 내용이 있으면 인도사랑-커뮤니티 게시판에 지적 부탁드립니다.



중세 인도네시아


식민지 이전 중세 인도네시아의 역사의 흐름은 종교를 중심으로 크게 “불교->힌두교->이슬람교”의 시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는 이미 여러국가로 이루어진 국가였기 때문에 힌두교시대가 되었다고 불교가 전지역에서 사라졌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불교시대 7~11세기

#스리위자야 #사이렌드라

스리위자야와 사일렌드라

스리위자야 왕국과 사일렌드라 왕국

인도네시아에 가장 먼저 국가의 형태를 이룬 것은 약 7세기경 수마트라 팔렘방 지역의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입니다. 스리위자야 왕국은 말라카 해협(말레이시아랑 수마트라 사이)을 중심으로 말레이반도 역시 지배하였으며, 종교로는 불교가 중심이었습니다. 무역의 요충지인 말라카해협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빠르게 번성할 수 있었죠.

그리고 두 번째로 융성한 왕국은 8세기경이 중/동부 자바에 있었던 사이렌드라(Shailendra) 불교 왕국입니다. 이들은 스리위자야 왕국과 불교라는 공통분모와 무역업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나갔습니다. 참고로 그 유명한 족자카르타의 보로부두르 사원이 사이렌드라 왕국의 불교 건축물입니다.


보로부두르 사원

보로부두르 사원

물론 동시대에 중부 자바에 산자야(Sanjaya) 힌두왕국이 큰 세력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군도 전체적으로는 불교를 중심으로한 스리위자야와 사이렌드라가 더욱 융성하였죠.

이후 불교왕국들은 내부 부패와 주변에 새로운 힌두교 세력들의 등장으로 서서히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한 신흥 힌두교 세력중 하나가 아이르랑가(Airlangga) 왕국입니다. 이들이 스리위자야 왕국을 자바섬에서 몰아내고, 불교왕국 시대의 막을 서서히 내리게 하였죠.



힌두교 시대 12~16세기

#싱하사리 왕국 #마자빠힛

싱하사리 왕국

싱하사리 왕국

아이르랑가 왕국이 융성하기 시작하면서, 자바섬에서 힌두교는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후 12세기경, 동부 자바(말랑)에 힌두교 왕국인 싱하사리(Singhasari) 왕국은 크게 번성하며 스리위자야 왕국의 본토인 수마트라 섬과 말레이반도를 공격하는 등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널리 위세를 펼칩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1293년, 당시 왕이었던 꺼르따느가라(Kertanegara)왕은 속국의 군주에게 살해당하고, 꺼르따느가라의 사위였던 위자야(Wijaya)가 몰래 도망 나와서 왕국을 세웁니다. 그 왕국이 바로 마자빠힛(Majapahit) 왕국입니다.

이 마자빠힛 왕국은 중세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제국이 됩니다.


마자빠힛 제국 지도

마자빠힛 왕국은 인도네시아 군도의 대부분을 점령하며 제국이 됩니다.

1294년부터 16세기까지 마자빠힛 제국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왕국의 상당수를 통일하며 크게 융성하였습니다. 특히 스리위자야 왕국을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말라카 해협을 통해 동남아와 인도, 중동으로 이어지는 해상 무역 루트 또한 거머쥐게 된거죠.

당시 인도네시아 전역에 힌두교+불교를 접목한 인도네시아식 힌두교를 전파합니다. 참고로 이는 후에 발리 힌두교의 모체가 됩니다.


마자빠힛 제국의 분열과 이슬람 문화 침투

#드막 술탄국 #반뜬 술탄국

말라카 해협을 장악한 마자빠힛 제국은 어느때보다도 국제 무역을 활성화하였습니다. 마자빠힛 제국의 전 섬에 있는 상인들은 모두 말라카 해협 주변으로 가서 페르시아와 중국계 상인들과 교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상품거래와 함께 선진문물의 유입도 대거 있었죠. 그러한 선진문물로 여겨지던 것이 바로 이슬람 문화입니다. 이와같이 인도네시아에 이슬람 문화는 매우 평화로운 방식으로 유입되었습니다.

마자빠힛 제국은 수많은 섬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력이 매우 약했고 분열이 잦았습니다. 특히 동서분쟁이 심해서, 동서황실 간의 빠레그래그(Paregreg) 내전도 있었죠.

이 틈을 타, 무슬림 인구가 많았던 자바 북쪽 항구 주변의 이슬람 세력들이 슬슬 독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막 술탄국(Kesultanan Demak)과 반뜬 술탄국(Kesultanan Banten)이 대표적이죠.

또한 중국 명나라는 말레이반도쪽에 있던 말라카 술탄국(Kesultanan Melaka)을 지원해 마자빠힛 왕국을 압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드막 술탄국은 마자빠힛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리죠. 이 시점부터 인도네시아에 있던 힌두교 신자 및 왕족들은 모두 발리로 피난가게 되었습니다.



근대 인도네시아 - 식민지 역사

인도네시아 군도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일본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포르투갈은 북쪽섬을 점령했다가 네덜란드에게 밀려났고, 프랑스와 영국은 잠깐씩 주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총독부를 뺏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 세계 2차대전 때 일본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지만, 일본 패망한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나가자, 네덜란드는 다시 인도네시아를 침략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외교적으로 압박하여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물러나게 되고, 인도네시아는 독립에 성공합니다.



포르투갈 침략 1512년 ~ 1602년

#첫번째 외세 #90년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에 침략한 외세는 포르투갈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이미 대항해시대를 선도하며 여러 국가를 점령했었죠. 이미 스리랑카를 점령했던 포르투갈군은 향신료를 더 얻기 위해 말라카 술탄국과 말루쿠 지역(암본쪽) 등을 점령하게 되었죠.

이들은 이미 점령한 곳에서는 향신료(정향, 육두구, 후추 등)를 재배하고, 점령되지 않는 왕국에서는 헐값에 사서 본국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향신료는 유럽에서 불티나게 팔렸죠. 또한, 포르투갈인들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천주교(로마 가톨릭) 전파에도 힘썼습니다. 그래서 현재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지역들은 천주교세가 매우 강하죠.



네덜란드의 침략 1602년~1942년

#두번째 외세 #340년 (10년은 프/영에 빼앗김)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침략

네덜란드가 현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모두 점령하는 과정

네덜란드가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의 땅을 밟게 된 것은 1596년에 반뜬에 도착한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그 지역의 한 마을을 점령하고, 향신료를 잔뜩 들고 귀국했죠. 그 이후, 1602년에는 본격적으로 선단을 이끌고 인도네시아 점령작업을 시작합니다.

네덜란드 식민지의 첫 시작은 “동인도회사” 였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역사상 첫 주식회사로, 협력사의 돈을 받아 회사를 세우고 이익을 내면 배당을 나눠주는 형식의 회사였죠.

이들은 본국인 네덜란드의 원조를 최소화하고, 자생적으로 이익을 실현하여 본국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당하는 방식으로 식민지를 경영하였습니다. 주요 품목은 주석, 고무같은 자원과 커피, 녹차, 향신료 등이었고,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땅에서 나는 것 중 돈이 될만한 것들은 전부 수탈해갔죠. 반뜬에서 시작했지만 이내 자바섬은 물론이고, 포르투갈인들이 선점했던 암본까지 뺏어버립니다. 1641년에는 말레이 반도도 뺏었죠.

동인도회사 총독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기


그러나 동인도회사의 운영이 열성적이었던 초창기와 달리, 1700년대 말의 동인도회사는 부패의 온상이 되었고, 영국과의 향신료 무역경쟁에서 패배하여 파산해버립니다. 결국 1799년 12월 31일에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국유화하여 직접 관리하게 되었죠.



프랑스 지배 (1806-1811) & 영국 지배(1811-1815)

#10년간 뺏음

동인도회사가 파산한 것과 별개로 네덜란드는 영란전쟁에서 완패하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에 패전하며 나라를 뺏깁니다. 이 때 나폴레옹이 자신의 동생을 네덜란드의 왕으로 임명하였죠.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주인이 다시 또 프랑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즉,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네덜란드 본국을 점령하게 되면서, 네덜란드의 주인이 프랑스가 되었고, 인도네시아 역시 프랑스의 지배권에 놓이게 되었죠.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던 네덜란드인들이 운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이후 곧 1811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는 또다른 침략자가 나타납니다. 바로 영국군이었죠.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항상 식민지 땅따먹기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경쟁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일어났습니다. 1811년에 영국이 자바섬을 공격하여, 프랑스령이었던 동인도를 영국이 뺏어버리게 되었죠.

그 후 나폴레옹 전쟁이 프랑스의 항복으로 끝난 1815년,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협상 끝에 동인도를 다시 돌려받습니다.

이후 10년 뒤 이뤄진 1824년 2차 조약에서, 네덜란드가 현재 인도네시아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고, 영국은 말레이시아 반도(말레이시아/싱가폴)를 나눠 갖게 됩니다. 이로써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1942년 일본에 패배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 군도의 대부분을 침략하여 현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영토를 그어 놓습니다.



독립단체 형성

#수카르노 #PNI

1900년대 초,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난 시점 즈음하여, 인도네시아에서도 독립운동가 및 독립단체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독립운동가는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였죠. 수카르노는 자바인의 아버지와 발리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트 인도네시아인으로 반둥공대 공학학사 출신입니다.


수카르노


이미 대학생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아, 스터디클럽을 만들고 반식민지 운동을 도모했죠. 이 스터디클럽의 맴버들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연합(Peserikatan Nasional Indonesia, PNI)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후에 인도네시아 국민당(Partai Nasional Indonesia, PNI)이 되면서 독립을 주도하는 정당이 되죠.

이를 바탕으로 수카르노는 각지에서 엘리트 청년들을 끌어모아 청년당을 이끌고, 사실상 독립정부의 첫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이 때 제창한 “청년의 맹세”에서 현 인도네시아의 “국기”와 “공식 국어”를 정했습니다.

1929년에 이러한 독립운동의 의지를 발견한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수카르노를 반동분자로 보고 체포하여 징역 4년을 선고합니다. 물론 PNI도 해체되었죠.


일본의 점령과 일본패망

#독립선언

1941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일본이라는 새로운 침략자가 등장합니다. 1931년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물자(석유, 석탄, 철광석) 등의 자원수탈을 위해 동남아로 진격하였습니다. 이 때 일본은 영국과의 싱가포르 전투, 홍콩 전투에서 승리하고, 바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공격합니다. 네덜란드는 자바섬에서 영국, 호주, 미국과 합세하여 연합군을 형성했지만 일본이 또 이기게 됩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 군도의 주인은 일본으로 또 바뀌게 되었죠. 그리고 이때 현 자카르타인 바타비아라는 도시명을 Djkarta로 바꿉니다.(이후 1972년에 D가 빠지고 Jakarta가 됨)

당시 같은 아시아인인 일본에 의해 네덜란드인들이 쫓겨나가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제 해방하는가 싶었는데,
일제 군정 식민지 동안 더욱 가혹한 폭압을 겪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인도네시아인들을 길들이기 위해 반서방 민족주의자와 친일파를 키웠죠.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인 수카르노와 하타도 이 당시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하여 일본 식민정부를 도왔습니다. (가령, 수카르노와 하타는 인도네시아인 강제징용을 직접 주도했죠. 징용에 동원된 인구가 최소 400만에서 최대 1,000만명이고, 이들 중 죽거나 외국에 버려진 비율은 약 15%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8월,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일본은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수카르노와 하타는 인도네시아는 바로 8월 17일에 독립선언을 합니다.


독립전쟁

#네덜란드 재침략 실패

일본의 패망 이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다시 차지할 야욕을 부립니다. 네덜란드는 연방주의를 표방하며, 친화란파 인도네시아인들과 함께 자바섬을 재침입하여 수많은 살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실제로 여러 섬과 민족으로 나뉜 인도네시아는 단결력이 없었고, 인니군 자체가 완전히 야매군대였기 때문에, 네덜란드군에게 확실히 밀렸죠.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모든 전쟁의 종식을 이끌었던 미국이 네덜란드에게 인도네시아에서 군을 빼지 않으면, 네덜란드에게만은 마셜플랜(미국의 유럽국가 반공지원금)을 유보하겠다고 선언합니다.(*유보하겠다는 말은 전형적인 외교수사로, 마셜플랜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의미였죠.)

2차대전 이후 미국은 강대국의 위치에 올랐지만, 유럽 국가들은 모두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기 때문에, 미국이 하자는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와 전쟁을 시작한지 4년 5개월만에 80만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키고 포기하게 되었죠.

1949년 12월에 네덜란드군은 물러가고 인도네시아는 드디어 완전한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을 1945년 8월 17일이 아닌, 네덜란드와 UN이 합의를 본 1949년 12월 27일로 기록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재침략은 대인니 네덜란드의 만행 중에 가장 야만스러운 악행으로 손꼽힙니다. 나치독일한테도 나라를 뺏겼던 네덜란드인데, 연합군이 살려줬더니 기가 살아서 인도네시아를 다시 공격한 것이니까요.

*나무위키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공산화가 되기 힘들것이라보고, 미국이 인도네시아를 독립시켜준 거라고 합니다만,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점령해야 오히려 공산화가 안 될 것이기 때문에 이 논리는 안 맞죠. 오히려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식민지를 발판삼아 미국의 최강국 권위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실제로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연합국들의 식민지들조차도 모두 토해내게 만듭니다. 




현대 인도네시아 - 독립 후 군부독재와 문민정부

현대 인도네시아사는 크게 독재정권과 문민정부 기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재기간은 반서방 민족주의자 수카르노와 친서방 반공주의자 수하르토로 나뉩니다. 수하르토 독재 이후로 군부출신 정치인들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2014년 대선 이후 최초로 순수 민간인 출신인 조코위도도가 대통령이 됩니다.



수카르노 독재정권 (1945년 ~ 1966년)

#초대대통령 #반서방 민족주의

수카르노와 하타

수카르노 대통령과 하타 부통령


인도네시아 독립에 가장 많은 역할을 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국민당(Partai NasionalIndonesia, PNI)을 이끌며 국가의 기본적인 기틀을 잡는데 노력합니다. 이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절에 네덜란드 소속 군인으로 활동하던 말루쿠 군,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였던 다룰 이슬람(Darul Islam)등이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하였고, 현 파푸아지역인 이리안자야는 해방투쟁을 벌이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내정상황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1956년 수카르노는 당시 인도네시아보다 더 큰 대국을 강한 중앙집권체제로 통치하던 중국의 모택동(마오쩌둥)을 만나고 온 뒤, 교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기로 합니다.

교도 민주주의란, 소수의 엘리트가 지도해주면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일종의 독재 형태였습니다. 즉, 이미 정부에서 결정이 끝난 주제지만, 이 주제에 대해 국민들이 서로 토론을 하고, 소수의 엘리트가 어긋나는 주장을 (자신들이 이미 결정한)올바른 길로 교도하면서 원하는 결론에 이르는 방식입니다. 요즘 말로, 답정너식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보기 힘들지만, 무지한 국민들을 계몽하면서 올바른 길을 가는 데 어느정도 성공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다민족 국가임에도 잡음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주체성 확립과 중앙 정부의 권력 강화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이후 인기가 좋아지자, 1959년 종신대통령을 하겠다고 대놓고 독재선언을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 2차대전 이후 미소냉전 체제하에 비동맹 제3세계 노선을 걷게 됩니다. 즉, 미소 어느 쪽에도 동맹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이 비동맹 제3세계에 속해있었죠.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당시 소련과 동맹이 아닐뿐, 협력을 많이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1965년, 수하르토의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소련은 인도네시아에 최대 원조국이었니까요.

사실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네덜란드에 반감이 큰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집권 초기부터 민족주의와 반서방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여기서 서방은 유럽과 미국을 뜻하죠. 한편 중국과는 관계가 좋았습니다. 또 비동맹이라 해놓고, 1965년엔 북한 김일성을 인도네시아에 초대까지 했죠. 그러니, 말로는 비동맹 제3세계이지만, 몸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따라다니고 있었던 겁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 (1967년 ~ 1998년)

#반공주의자 #극우

1965년에 인도네시아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G30S(Gerakan 30 September)라고 불리는 사건인데, 공산주의자들이 친서방 우파 장성군인 6명을 암살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육군 소장이었던 수하르토 전략예비사령관은, 그의 이웃이 여러 장성군인들이 밤새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알려주면서, 암살을 피할 수 있었죠. 그리고 역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G30S 사태에 대해 여러가지 말이 많은데, 애초에 친서방 우파색을 띄던 장군들이 힘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예상해서, 수카르노 및 공산주의자들이 선제적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수카르노는 이미 자신에 반대하던 우파당을 해산시켜버리고, 경제적으로도 실패해서 하이퍼인플레이션까지 일으킨 바람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몰린 상태였으니까요.

아무튼 죽을 뻔했던 수하르토는 반공주의를 앞세워,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을 무지막지하게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 자료가 다 지워졌거나 사라졌지만, 추정상 이때 50만명 이상이 죽었고 100만명 이상이 투옥당했다고 합니다. 이때 진행된 학살에 의해 공산주의자는 물론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쿠데타 이후 수하르토는 수카르노를 실각 시켜버리고, 1968년 3월에 정식 대통령이 됩니다.


수하르토 대통령

수하르토

수하르토는 이후 인도네시아에 반동세력을 처단한다는 이유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서파푸아와, 합병을 거부하는 동티모르를 모조리 무력으로 해결해버렸습니다. 쉽게 말해서 독립하겠다는 곳 가서 전쟁한거죠. 이로서 자국민 수십만명을 더 죽였습니다. (이후 동티모르는 수하르토가 퇴진하자마자 바로 독립해버립니다)

수하르토는 신질서(Ordr Baru)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신질서란, 이전 수카르노까지의 구질서를 청산한다는 심판론에 근거합니다. 이를 통해, 이전 수카르노 때와 정반대인 반중 친서방 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전에 비해 인도네시아는 해외투자 유치를 많이 할 수 있었고, 매년 연평균 7%의 경제성장은 무리없이 유지했습니다. 특히나 농업에 큰 투자를 해서, 1984년부터는 주곡인 쌀로 자급자족을 이루었죠. 그러나 권력의 집중이 강한 만큼, 족벌주의와 부패가 만연해 경제위기를 맞게 됩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탄압

#화교탄압

수하르토는 화교와 무척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사실 G30S 사태의 배후가 중국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쿠데타 이후 바로 중국관련기관부터 수색하고, 사망한 장군들의 장례식때 중국에서 보낸 조기게양을 거부합니다. 실제로 중국은 아시아 전역에 공산화를 주도했었기 때문에 수하르토가 중국을 싫어하는 것이 잘 못 된 생각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수하르토의 신질서(Ordr Baru)에 의해, 대외적으로는 반중친서였고, 대내적으로는 동화정책이라는 미명아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개명을 강요합니다. 이 시기쯤에 중국어로 교육하던 중국 학교도 다 폐쇄당했고, 정치와 군에는 화교라는 이유로 법적으로 자격을 박탈시키죠. 종교에서도 중국에서 기원한 유교를 없에버려서, 화교들은 불교나 기독교로 바꾸게 됩니다.


경제 위기와 폭동

#화교상대 폭동 #수하르토 퇴진

수하르토는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 시절에 외환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IMF 에서 요구한 조건은 부패척결이었고, 이는 수하르토 가족사업이 연루되어서 수하르토가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수하르토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집회가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일어났고, 시위는 점차 격해져갔습니다. 이 때 자카르타 트리삭티 대학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는데, 진압조의 발포로 대학생 4명이 사망합니다. 이로써 시위가 대규모 폭동으로 번지게 된 와중, 폭동의 화살이 오히려 인도네시아 화교들을 향하게 되죠. 그러면서 화교들이 시위조와 싸우다 어마어마하게 죽게 됩니다.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되었지만, 의외로 관련정보가 불분명합니다. 폭동의 잔혹한 사진은 다른 사건의 사진이라고도 하고, 당시 죽은 사람들은 화교가 아닌 토착민이 더 많다고도 하니까요. 사상자의 수도 화교가 아닌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링크)

근데 당시 자카르타에 살았던 사람(인도네시아 화교나, 한국계 교민 등)은 화교가 훨씬 많이 죽었다고들 말합니다. 실제로 당시 수도노 살림같은 화교 재벌들은 아예 싱가폴로 도망갔죠.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발표되는 정보 자체가 신뢰성이 하도 떨어지니까, 이런 저런 말들이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수하르토 정권이 의도적으로 폭동의 방향을 기독교+자본가인 화교로 돌렸다는 루머도 있습니다. 그동안 수하르토의 반중행보와, 그 당시 자국민인 인도네시아인 화교들이 폭도들에게 죽어나는데도 군경들이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죠. 

폭동이 격해지고, 군과 정계가 국민여론에 승복하는 자세를 보이자, 수하르토정권은 말그대로 무정부상태가 되버립니다. 그 결과 수하르토는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부통령인 유숩 하비비가 남은 임기동안 직무대행하는 것으로, 길고 긴 32년간의 수하르토 독재정권은 마무리 되었죠.



독재정권 이후 문민정부 출범

#와히드 #메가와티 #유도요노 #조코위

수하르토가 퇴진한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유숩 하비비는 사실 큰 힘이 없었습니다. 정식으로 선출된 대통령도 아니고, 이양받은 임기가 겨우 500일 남짓했으니까요. 다만, 그동안 수카르노-수하르토 군사정부에서 악용되어온 국민평의회(MPR)의 인원을 감축하고, 대통령 임기 및 권한을 제한하는 등 군부독재를 반대하는 여론을 일부 수렴합니다. 또한 독립하겠다고 주장하는 지방정부를 오히려 투자로 회유하는 정책을 시작했죠.

군부독재 후 첫 대선인 1999 대선에서는, 직능단체당 유숩 하비비, 골카르당 메가와티(수카르노 딸), 국민계몽당 압둘라만 와히드. 이렇게 3명이 주요 후보였습니다.

이 중 유숩 하비비는 이미 경선에서 포기한 상태고, 와히드는 국민계몽당에서 급조한 대선후보라 정치기반이 약한 후보였습니다. 반면 메가와티는 이미 6,7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수카르노 정치기반이 있기 때문에 가장 유력했죠. 하지만, 무슬림이 많은 나라다보니 여성이 국가 수장을 맡는다는 것에 대해 반발이 심했고, 와히드는 무슬림세력에 힘입어, 실제 투표에서는 와히드가 당선되었습니다.

이 때 정치기반이 약했던 와히드는 메가와티에게 부통령을 제안했고, 메가와티는 수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와히드는 2001년 11월에 권력남용 문제로 2년도 못 하고 탄핵당했고, 메가와티가 대통령직을 승계받게 되었죠.

2004년에는 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대선은 직선제가 되었고, 메가와티는 연임을 위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상대로 나온 후보인 민주당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BY)는 반(反) 와히드세력으로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왔죠.

참고로 유도요노는 전 육군 중장출신인데다 와히드 정권 때 정치안보 장관이었습니다. 와히드의 탄핵위기 때 계엄령을 선포해달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그 지시를 거부하고 장관직을 해임당한 전력이 있습니다. 물론 탄핵 사건 후,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은 메가와티 대통령이 다시 재임명을 해줬지만요.

사실 메가와티와 유도요노는 안보강화, 반부패척결 및 해외투자 유치 등등 비슷한 공약을 들고 나왔지만, 사람들 눈에 메가와티 후보는 탄핵된 와히드와 별반 다를게 없이 보였고, 이 덕분에 유도요노는 반사이익을 받을 수 있었죠.

유도요노는 압도적 표차로 당선이 되고, 이후 2009년 대선에서 다시 메가와티와 격돌하여, 또 이기고 재선까지 성공합니다.


조코위도도

#민간인 출신 대통령

2014년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조코위도도가 등장합니다.

조코위도도는 역대 대통령 중 군과 전혀 관계없는 순수 민간인 출신 대통령후보였으며, 수라카르타 시장과 자카르타 주지사를 지낸 경력이 있습니다. 조코위도도는 자카르타 주지사였음에도 상당히 서민적인 모습으로 유명했죠. 그는 사회통합과 청렴을 내세웠습니다. 통합을 강조한 예로 자카르타 주지사 시절에도 러닝메이트가 기독교 화교인 아혹이었죠.

상대로 나온 후보였던 프라보오 수비안토(수하르토의 前사위)는 이를 악용해서, 조코위는 싱가포르인의 피가 있고, 무슬림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기독교인이라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그러한 루머가 어느정도 효과를 내서, 큰 차이가 날 줄 알았던 선거에서는 약 6% 정도의 근소한 차이로 조코위가 당선되었죠.

조코위도도 대통령

조코위도도

조코위도도는 당선됬지만 순수 민간인 출신이라 뿌리깊은 군부출신 지도자들의 협조를 받지 못 합니다. 또한 정당기반이 취약해 여소야대 정국인데다, 자카르타 시장을 인계받은 아혹이 종교문제로 징역선고를 받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살얼음판을 걷습니다.

하지만 조코위는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보단 보통 사람 이미지를 내세워서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죠. 기존에 공약으로 내세웠던 연평균 8% 경제성장은 한번도 이룬 적이 없었어도, 4~6%의 경제성장은 안정적으로 유지했고, 투명성 제고정책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뒷돈으로 가능했던 많은 것들을 줄입니다. 이때문인지, 최근들어 뒷돈들여서 사업하는 게 잘 안 된다는 말이 도는 것 같습니다.

2019년 4월에는 이전에 붙었던 프라보워 수비안토와 다시 붙게 됩니다. 



2019년 인도네시아 대선

한국의 대선은 무엇보다 좌우 진영논리가 주요 쟁점이죠. 인도네시아의 대선도 이와 비슷하게, 종교 이슈가 가장 민감하고 중요합니다. 

조코위도도와 프라보워 수비안토 두 후보의 공약은 대동소이했습니다. 뭐 부패 없에겠다, 경제 살리겠다, 해외투자 늘리겠다 똑같죠. 당시 종교 관련 이슈에서, 프라보워는 이슬람 강성주의로 선거 유세 방향을 잡았고, 조코위도도는 판차실라 다문화주의로 선거 유세를 했습니다.

이때, 프라보워는 이슬람 극단주의자(사실상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배후라는 루머공격을 받은데다, 태생적으로 그는 기독교인이 무슬림으로 전향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 이슈에서 큰 효과를 받지 못 했죠. (프라보워 장인은 무슬림 독재자이었던 수하르토로, 프라보워는 결혼할 당시에 종교를 이슬람으로 개종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무슬림으로 크게 인정을 못 받습니다.)

결국에 결과는 55:45 로 조코위도도의 재선이 확정되었습니다.

선거에 있어서 흥미로운 점은, 사회 전반적으로 엘리트 계층과 공무원들은 프라보워를 지지했고, 일반적인 서민 계층 및 비이슬람은 조코위도도를 지지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조코위도도가 엘리트 계층과 공무원들로부터 인기가 없다는 점을 볼 수 있죠.


2019년 대선 결과 지도

2019년 인도네시아 대선 결과 지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결과 지도인데, 붉은 색이 조코위도도가 우세했던 지역이고, 갈색이 프라보워 수비안토의 우세했던 지역입니다.

공무원과 이슬람 인구가 높은 서부 자바와, 강성 이슬람 인구가 높은 수마트라 섬은 대부분 프라보워가 우세했던 것을 볼 수 있죠.


대선결과 불복 소송과 기각, 조코위 재임 확정

프라보워는 자체적으로 실시한 선거 득표율이 있었기 때문에, 5월 22일 선거 개표 발표일 이전부터 자축파티를 열었습니다. 이 당시 프라보워는 자기네들이 62% 전후의 득표를 했기 때문에 결과는 보나마나라고 했죠. 하지만 조코위도도가 55%로 승리하자, 대선 개표일 당일부터 시위도 하고, 소송도 걸었습니다.

6월 27일에 헌법재판소에서 기각시켜버립니다. 결국 조코위도도는 2019년 10월부터 다음 5년간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죠. 

사람들은 조코위도도가 서민출신에 착해보이는 이미지가 있고, 프라보워의 장인어른이 인도네시아 부패의 상징인 수하르토이기 때문에, 조코위도도가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보고 있지만, 정치쪽의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튼 결과는 조코위도도가 다시 5년을 더 하게됐죠. 


재선까지 성공한 조코위도도는 옴니버스 법안 개정안을 강행합니다. 이 개정안이 포함한 내용은 해외기업 유치를 위한, 친기업 반노동적 정책이 주된 내용으로, 각종 반발과 시위를 일으켰죠.

이 때문에 지지율은 크게 하락했으나, 미중갈등 속 탈중국 시기와 겹쳐 해외기업 유치에 비교적 성공했다는 평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2021년까지도 코로나로 인한 팬대믹 시기와 맞물려, 경기가 크게 살아나진 못 하고 있습니다. (이후 계속 업데이트 하겠음)